제임스 오글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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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오글소프는 18세기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박애주의자로서, 조지아 식민지 건설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중퇴하고 군 복무를 시작하여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영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해군 개혁과 채무자 감옥 개혁을 추진했다. 오글소프는 1732년 조지아 식민지를 건설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고,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군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말년에는 문학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코르시카 독립을 지지했다. 오글소프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식민지 주민들에게 동정심을 보였으며, 1785년 사망 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물과 시설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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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오글소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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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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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임스 에드워드 오글소프 |
출생일 | 1696년 12월 22일 |
출생지 | 고덜밍, 서리, 잉글랜드 |
사망일 | 1785년 6월 30일 |
사망지 | 크랜햄, 에식스, 잉글랜드 |
국적 | 영국 |
직업 | 군인, 정치인, 식민지 행정관 |
배우자 | 엘리자베스 (결혼 전 성씨: 라이트) |
교육 | |
모교 | 이튼 칼리지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옥스포드 프랑스 파리의 군사 학교 |
정치 경력 | |
정당 | 토리당 |
하원 의원 (선거구) | 해즐미어 |
임기 시작 | 1722년 |
임기 종료 | 1754년 |
이전 의원 | 니컬러스 케어 |
다음 의원 | 제임스 모어 몰리뉴 |
조지아 총독 | |
임기 시작 | 1732년 |
임기 종료 | 1743년 |
전임자 | 직위 신설 |
후임자 | 윌리엄 스티븐스 |
총리 | 로버트 월폴 경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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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1722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오글소프는 해슬미어 지역구 대표로 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박애주의자로 활동하며, 1728년 의회에서 '해병의 옹호자'라는 익명의 출판물을 통해 영국 해군 해병들이 겪는 열악한 환경 개선을 주장했다.[1]
오글소프는 친구 로버트 카스텔이 채무자 감옥인 플릿 감옥에 수감되어 사망하자, 감옥 상황에 주목하고, 1729년 2월 25일 감옥 관리인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감옥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채무자 감옥을 순회하며 고문, 과밀, 질병 등 감옥 내 악행을 묘사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특히 플릿 감옥 관리인 토마스 밤브리지를 비판했다. 오글소프는 감옥 담당자 기소를 통해 감옥 개혁을 촉구했으나, 대부분의 책임은 시스템 전체가 아닌 개별 관리인에게 돌아갔고,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알렉산더 포프, 제임스 톰슨, 새뮤얼 웨슬리, 윌리엄 호가스 등은 오글소프와 위원회를 칭찬했다. 그러나 하원 보수당 의원들은 위원회를 비난하고 관리인 투옥을 막으며 변화를 막으려 했다. 밤브리지 해임 법안은 기각되었고, 윌리엄 액턴은 채무자 4명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오글소프는 소송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했고, 밤브리지 또한 무죄 판결을 받자 두 판결을 모두 비난했다. 얼마 후 그는 위원회를 해산했고, 1754년에 같은 성격의 위원회를 다시 이끌었다.
오글소프는 런던에서 투옥된 부채 범죄자들의 환경 개선 운동을 펼쳤다. 그는 파산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유럽 대륙에서 억압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스페인령 플로리다 사이의 미국 식민지에 이들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 1. 가문과 출생
제임스 오글소프의 가계는 윌리엄 정복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내전 당시 잉글랜드의 찰스 1세를 지지했으며, 올리버 크롬웰 치하에서 고난을 겪었지만, 1660년 스튜어트 왕정 복고 이후 다시 총애를 받았다. 가문의 수장이었던 테오필러스 오글소프(Theophilus Oglethorpe)는 화이트홀 궁전 옆에 살았으며,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의회 의원이었다. 화이트홀에서 테오필러스는 앤 여왕의 시녀 중 한 명이었던 엘레노어 월(Eleanor Wall)을 만나 1680년 결혼했다. 그들은 열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루이스, 앤, 엘레노어, 테오필러스 2세, 제임스, 프랜시스 샬롯, 서튼, 루이즈 메리, 그리고 제임스 에드워드였다. 제임스 에드워드는 오글소프 부부의 막내이자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1696년 12월 22일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그의 가족의 왕당파적 성향을 반영하여 제임스 2세의 이름을 따 제임스라고 명명되었고,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이름을 따 에드워드라고 명명되었다. 그는 런던의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에서 12월 23일에 세례를 받았다.[1]
오글소프는 서레이 주 웨스트브룩에서 테오필러스 오글소프(1650–1702)와 엘레노어 레이디 오글소프(1662–1732)의 아들로 태어났다. 1714년 옥스퍼드에 있는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같은 해 대학을 자퇴하고 사부아 공자 외젠 휘하의 군대에 입대했다.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추천으로 공작의 부관이 되었으며, 1716년부터 1718년까지 진행된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튀르크 군에 맞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복무했다.
2. 2. 교육 및 초기 군 경력
오글소프는 1707년 앤 여왕의 제1 보병 근위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2] 1713년 11월 21일, 그는 대위 계급을 받고 임관되지 않은 중위가 되었다. 그는 형제들을 따라 이튼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하도록 주선했고, 1714년 7월 8일 베이질 케넷을 교수로 하여 입학 수속을 마쳤다.[3] 그러나 같은 해 사부아 공자 외젠 휘하의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대학을 자퇴했다.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추천으로 외젠 공작의 부관이 되었으며, 1716년부터 1718년까지 진행된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터키군에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복무했다.[3] 1715년 조지 1세는 그의 군 복무를 갱신했지만, 오글소프는 보병 근위대가 전투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1715년 11월 23일 사임했다.[3]그 후 오글소프는 프랑스로 가서 파리 근교 롬프레의 육군사관학교에 다녔고, 거기서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키스와 친구가 되었다. 다음 해, 그는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유진 사보이아 공 휘하에서 복무했다. 오글소프는 1716년 8월 페트로바라딘 전투에 참석했지만 적극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았다. 9월 테메슈바르 공성전에서 그는 부관으로 복무했다.[3] 1717년 6월 19일부터 8월 16일까지 벨그라드 공성전에서 활동적인 지휘를 경험했다. 8월 16일 상관이 전투 중 사망하자, 가장 고위급 부관이었던 오글소프는 참모장 역할을 수행하고 튀르크 진영을 장악하여 공에게 사상자를 보고했다.[4] 전투 후 그는 중령 계급을 제안받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1718년 오글소프는 몇 주 동안 조르주 올리비에 발리스 장군 휘하에서 시칠리아에서 싸웠다. 9월 19일까지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오글소프는 영국 육군의 임관을 거부당했고, 1719년 6월 25일부터 잠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로 돌아왔다.[3]
1722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해슬미어 대표로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박애주의자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728년 의회에서 '해병의 옹호자'라는 익명의 출판물을 통해 영국 해군의 해병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환경의 개혁을 주창했다.
1720년대 후반, 오글소프의 친구 로버트 카스텔이 채무자 감옥인 플릿 감옥에 수감되어 사망하자, 오글소프는 감옥의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다. 오글소프는 감옥 관리인에 대한 조사를 제안했고, 1729년 2월 25일 그 결과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감옥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는 채무자 감옥을 순회하며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들은 고문, 과밀, 만연한 질병을 포함한 감옥 내의 여러 가지 악행을 묘사했고, 특히 플릿 감옥의 관리인인 토마스 밤브리지를 비판했다. 오글소프는 주로 감옥 담당자들을 기소하는 방식으로 감옥 개혁을 촉구했다. 대부분의 책임은 시스템 전체가 아닌 개별 관리인에게 돌려졌다. 이 보고서는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알렉산더 포프, 제임스 톰슨, 새뮤얼 웨슬리, 윌리엄 호가스와 같은 저명한 영국인들이 오글소프와 위원회를 칭찬했다. 그러나 하원의 보수당 의원들은 위원회 구성원들을 비난하고 관리인들이 투옥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변화를 막으려고 했다. 밤브리지를 해임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기각되었고, 윌리엄 액턴은 채무자 4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오글소프는 소송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했다. 밤브리지 또한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오글소프는 두 무죄 판결 모두를 비난했다. 얼마 후 그는 위원회를 해산했다. 그는 1754년에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위원회를 이끌었다.
또한 런던에서 투옥되어 있는 부채 범죄인들의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운동을 펼쳤다. 이런 파산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목적으로 또한 유럽 대륙에서 억압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해서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스페인령 플로리다 지역의 사이에 미국 식민지에 이들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의회 활동 및 사회 개혁 운동
오글소프는 1754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조지아로 간 후에는 의회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로버트 월폴이 1742년 권력을 잃은 후에는 남은 영향력 대부분을 잃고 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입장에서 활동했다.[4]
3. 1. 의회 진출
26세에 오글소프는 형으로부터 서리주(Surrey) 고달밍(Godalming)에 있는 가족 소유지를 상속받았다.[3] 1722년 윌리엄 윈덤 경(Sir William Wyndham, 3rd Baronet)과 연대하는 토리당(Tory)으로서 하슬미어(Haslemere) 지역을 대표하여 영국 하원(House of Commons of the United Kingdom)에 처음으로 선출되었다. 오글소프는 1734년까지 무난하게 의원직을 유지했다. 술에 취한 싸움에서 한 사람을 죽이고 5개월 동안 투옥되었지만, 영향력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살인 혐의가 무죄로 밝혀지고 감옥에서 풀려났다.[5] 그는 10월 9일에 하원 의석을 차지했다.[6]피토프스키(Pitofsky)에 따르면, 오글소프는 "가장 생산성이 낮은 의원들 중 하나"였다. 그가 선출된 후 6년 동안 그는 단 두 번의 토론에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스윗(Sweet)은 오글소프가 강한 토리당 원칙을 가지고 유권자들의 처지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웅변적이면서도 정직한" 연설가였으며, 다양한 주제를 조사한 40개의 위원회 활동을 언급하며 그의 봉사를 높이 평가한다. 오글소프의 첫 번째 토론은 1723년 4월 6일에 있었는데,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지지한 혐의를 받은 프랜시스 애터버리(Francis Atterbury) 주교의 추방을 반대했지만 실패했다.
1728년, 오글소프는 영국 해군(Royal Navy) 선원들의 열악한 생활 및 근무 환경에 대한 대응으로, 징발(press gangs)과 임금 문제에 관한 익명의 팸플릿인 ''The Sailors Advocate''를 발표했다. 52페이지 분량의 이 팸플릿은 해군 개혁 및 강화, 그리고 강제징집 반대를 주장했지만, 다른 국가 해군의 업무 분석 외에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스윗은 이것을 오글소프의 자선 활동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이것이 "오글소프에게 미래의 노력을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경험을 제공했다"고 썼다. 이 팸플릿은 18세기에 여러 번 재판되었다.
3. 2. 채무자 감옥 개혁 운동
열렬한 금주주의자였던 오글소프는 감옥 위원회가 승인된 것과 같은 회기에서 맥아에 대한 세금을 제안했다. 그는 115,000파운드의 왕실 보조금이 체납액을 충당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낭비적이라고 비판했다. 오글소프는 또한 초기에 유럽 평화협상에 대한 영국의 개입에 반대했지만, 1730년에는 군사적 준비태세를 주장하기 시작했다.[1] 그는 1731년 파산한 자선협회를 조사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했다.[2] 1732년 의회 회기에서 그는 정부의 군축 정책에 반대하고 준비태세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했다.[3]4. 조지아 식민지 건설
1728년 의회 감옥 개혁 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오글소프는 파산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하고, 많은 파산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도시화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1733년 오글소프는 사바나에 기술 장교로 부임했다. 그는 빚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오글소프는 사바나에서 토지를 중앙, 공원, 농장 구획으로 나누고, 광장 격자 도로와 공유지를 배치하여 40개의 뜰 택지를 조성하는 오글소프 계획을 시행했다. 이주민들은 18개월 안에 주택을 짓고, 10년에 걸쳐 10acre의 농장을 경작해야 했다.
1740년 오글소프는 조지아에서 플로리다로 침입했다가 철수했고, 산 마르코스에 침공하기도 했다. 그는 노예폐지론자로서 1778년 흑인 빈곤층 해방위원회를 설립하고, 노예 해방과 서아프리카 정착을 위해 노력하며 시에라리온에 회사를 설립하고 프리타운 발전에 기여했다.
1733년 1월 13일, 오글소프가 탄 배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도착했다. 같은 해 2월 1일, 그는 조지아에 도착하여[2] 스페인과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둔 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이 영국의 존재를 싫어했기 때문에, 오글소프는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조지아를 남쪽으로 확장했다. 1737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영국과 스페인 정부 양쪽의 반발에 직면했다. 같은 해, 오글소프는 조지아 관리들의 명령을 어기고 40명의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부여했다.
1731년 12월 4일, 오글소프는 장-피에르 퓨리와 협력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에 토지를 정착시켰다. 그는 약 3000acre 규모의 토지에 1/4 지분을 얻었다. 그의 소유지인 '오글소프 남작령'은 그랜빌 카운티의 사바나 강 건너편 '팔라초콜라스'에 위치했다. 그는 관리들을 위해 약 2060acres의 구역을 소유했을 수도 있다. 1732년부터 1738년까지 오글소프는 조지아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군사 및 민정 분야를 모두 통솔했다. 1738년부터 1743년까지는 영국 연대를 지휘했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민정에도 관여했다. 그는 식민지에 거주한 유일한 주요 관리였다.
1734년 오글소프는 현재까지 운영 중인 솔로몬 프리메이슨 로지를 설립했다.[8]
오글소프는 조지아 정착을 위한 다층적 계획(오글소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가족 농업 중심의 경제를 지원하고, 무분별한 도시화로 인한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해 "농업적 평등" 시스템을 구상했다. 토지 소유는 50acre로 제한되었으며, 마을 구획, 정원 부지, 45acre 농장이 포함되었다. 자립적인 식민 개척자들은 더 큰 토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부양하는 계약 노동자 수에 따라 50acre 단위로 지급되었다. 계약 노동자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토지를 받았다. 매입이나 상속을 통한 추가 토지 취득은 금지되었다.[9]
제한된 권한으로 조지아에 도착했지만, 오글소프는 곧 식민지의 주요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야마크로 부족과 협상하고, 원주민 부족들의 대사가 되었으며, 민병대를 지휘하고, 사바나 건설을 감독하는 등 식민지 전반을 관리했다. 1733년 초, "모든 중요한 문제는 오글소프에게 먼저 제기되었다." 그는 다른 식민 개척자들과 떨어진 천막에서 생활했고, 일부는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오글소프는 사바나 방어를 위한 '최초의 요새' 건설 비용을 지불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18] 그는 재능 있는 외국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1733년 6월, 오글소프는 찰스턴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없는 동안 사바나 시민들은 권한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오글소프가 돌아와 해결하기를 기다렸다. 7월에 별도의 법원이 설립되었지만, 오글소프는 여전히 많은 민사 권한을 유지했다.
오글소프가 조지아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미 유럽인들과 동화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유럽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경제에 참여하는 존재로 인식했다.[10] 그는 "인디언들과의 공정한 거래"로 알려졌고, 사바나 건설 부지를 얻기 위해 토모치치 야마크로 부족장과 협상했다. 토모치치는 오글소프의 "신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되었다.
1734년 초,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이 제기되자 오글소프는 3월 2일 찰스턴으로 가서 인디언 문제를 논의했다. 캐롤라이나 지도부와 협의 후, 그는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고 원주민 부족 간 전쟁 발생 시 상인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상부 크리크 사이에 요새"를 건설할 대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오글소프는 패트릭 매케이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임무를 맡겼다. 5월 7일, 오글소프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면서 크리크 사절단을 동행했다.[11] 여기에는 야마크로와의 조약 비준 과정에 참석하도록 조지아 이사들의 초청을 받은 토모치치도 포함되었다.
사절단은 6월 16일에 도착하여 조지 2세와 그의 가족을 켄싱턴 궁전에서 만났다. 오글소프는 런던에서 칭송을 받았지만, 그의 팽창주의는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뉴캐슬 공작은 스페인을 동맹으로 삼고자 했기에, 스페인을 자극할 수 있는 오글소프의 식민지 노력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뉴캐슬은 결국 "이제 조지아를 포기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12] 식민지의 존재는 1730년대 후반 영국과 스페인 관계 악화의 한 요인이었다.[13] 토모치치는 영국을 떠나면서 오글소프와의 이별을 "죽음의 날"에 비유했다. 1735년 3월, 이사들은 오글소프의 요청에 따라 알타마하 강 요새 건설 등에 사용하기 위해 의회에 51,800파운드를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26,000파운드가 배정되었고, 이사들은 강에 두 개의 요새 건설을 승인했다.
오글소프의 귀환은 조지아 이사들의 회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이사들은 럼주와 노예 제도를 금지하고, 원주민과의 협상을 규제했다. 그는 원주민과의 무역 허가권을 부여받았고, 이를 활용하여 조지아 주민에게만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캐롤라이나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오글소프가 1734년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그의 부재 중에 민간 및 군 당국 간 갈등이 발생했고, 보고된 반란은 그가 돌아오기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1735년 12월, 그는 257명의 이민자들을 더 데리고 조지아로 떠났고, 1736년 2월에 도착했다.
식민지에 머문 9개월 동안, 오글소프는 주로 프레데리카에 있었다. 그는 스페인의 간섭을 막기 위해 설계된 이 마을에서 다시 최고 권위를 행사했다. 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5월에는 사바나로 가서 300~400건의 민원을 처리하며 "최고 민정 당국"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오글소프는 점차 조지아 남쪽 국경과 군사 문제에 집중했고, 자신이 "통치에 가장 적합하다"는 믿음을 유지했다. 1736년에는 인디언 문제 담당관으로서 원주민들과 회의를 가졌다. 오글소프의 행동에 대한 불만은 스페인, 캐롤라이나, 이사들, 그리고 불만을 품은 시민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오글소프는 군대 요청을 위해 11월에 식민지를 떠났고, 또 다른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불만이 커지자, 오글소프는 이를 자신의 부재 탓으로 돌렸다. 영국에서 그는 이사들에게 자신의 "결점 없는 행동"을 설득했고, 감사를 받았다.
오글소프는 1735년 하원에서 노예 제도를 금지했다.[3] 그는 노예 제도가 조지아가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는 노예들이 스페인과 협력하여 자유를 얻을 것을 우려했다. 또한, 조지아는 캐롤라이나처럼 쌀 중심 경제를 발전시킬 계획이 아니었고, 누에고치와 포도주 중심 경제를 지향했기 때문에 대규모 노예 제도가 불필요했다. 그는 노예 제도가 "조지아 백인 주민들의 도덕과 관습"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3]
오글소프는 1730년대 후반 노예 제도 금지를 옹호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수탁자들은 1750년에 금지령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3]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기 작가 마이클 서몬드는 "제임스 오글소프, 조지아의 아버지 - 노예 상인에서 폐지론자로의 건국자의 여정"(2024)에서 오글소프와 노예 제도의 관계가 복잡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원래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이사였던 그는 미국 방문 후 노예 제도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꼈다. 서몬드는 오글소프의 노예 제도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서신과 기록들이 있다고 말한다. 1739년 초, 오글소프는 조지아에 노예 제도를 도입하면 "아프리카의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예 제도의 폐해를 알리기 위해 영국으로 간 두 명의 전 노예를 도왔다. 이후 그는 영국 폐지론 운동의 초기 창립자인 그랜빌 샤프와 한나 무어와 교류했다.[18]
4. 1. 건설 배경 및 계획
1728년 의회에서 감옥 개혁 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오글소프는 3명의 끔찍한 파산자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위원회 활동으로 많은 파산 죄수들이 석방되었지만, 오글소프는 이것이 또 다른 도시화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감옥 위원회에서 일하는 동안 오글소프는 존 퍼시벌(후에 첫 번째 에그몬트 백작이 됨)과 가까워졌다.[3] 위원회를 떠난 후, 오글소프는 런던의 실업자 약 100명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을 고려했다. 1730년, 그는 퍼시벌과 새로운 미국 식민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공유했다. 이 식민지는 "실업자와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을 보낼 곳이 될 것이었고, 그는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예상했다.[3] 킹이라는 사람의 재산 신탁인들은 곧 오글소프에게 식민지 건설을 위해 5000GBP를 제공했다. 그는 토마스 브레이를 만나, 1730년 브레이의 사망 후 브레이 협회를 설립하고, 오글소프는 신탁인으로 임명되었다.[3]
처음에는 식민지의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오글소프는 사바나 강 남쪽의 식민지가 캐롤라이나와 스페인령 플로리다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원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1730년 6월 26일에 그 지역을 선택했다. 식민지로 보내진 사람들은 병사이자 농부로서 역할을 하여 식민지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최전선 방어'로 만들었다.[3] 7월, 그들은 구독과 보조금을 통해 자금을 모으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브레이 협회는 7월 1일에 '모든 이용 가능한 자금'을 식민지에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9월 17일에 영국 추밀원에 헌장을 제출했다.[3] 11월 12일, 브레이 협회는 홍보 캠페인을 통해 제안된 식민지에 대한 지원을 늘리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제안에 대한 최초의 서면 자료는 오글소프가 작성한 ''미국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신탁인들의 계획에 대한 일부 설명''이었다. 1731년 봄에 완성되었지만 출판되지 않았지만, 벤자민 마틴은 1732년에 쓴 그의 저서 ''미국 조지아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신탁인들의 계획에 대한 일부 설명''에서 이를 인용했다.[3]
오글소프는 마틴의 작품이 널리 읽히도록 했는데, 독립적으로 출판된 것 외에도 ''런던 저널'', ''컨트리 저널'', ''신사 잡지'', ''사우스캐롤라이나 가제트''에 실렸다. 식민지로 이주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과 기부금을 구하는 다양한 공고가 다른 영국 신문에 게재되었다. 1732년 11월, 오글소프는 ''식민지와 관련된 선정된 논문들''을 출판했다. 1733년, 마틴의 ''미국 조지아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이유들''과 오글소프의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지방에 대한 새롭고 정확한 설명''이 출판되었다.[3]
1732년 6월 9일, 오글소프, 퍼시벌, 마틴, 그리고 다른 저명한 영국인들(집합적으로 미국 조지아 식민지 건설을 위한 신탁인으로 알려짐)은 사바나 강과 알타마하 강 사이에 조지아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왕실 헌장을 청원했고, 결국 허가를 받았다.[3][7]
4. 2. 오글소프 계획
1728년 의회에서 감옥 개혁 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오글소프는 3명의 끔찍한 파산자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위원회 활동으로 많은 파산 죄수들이 석방되었지만, 오글소프는 이것이 도시화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9]박애주의자였던 그는 빚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의 피난처를 만들고자 미국 땅에 왔다. 오글소프가 사바나에서 실시한 계획은 토지를 중앙과 공원, 농장 구획으로 나누고, 광장 격자 도로를 배치하며, 공유지 또는 공용 공간을 배치하여 40개의 뜰 택지로 만드는 지역을 조직화하여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주민들에게는 18개월 이내에 주택을 짓고, 10년에 걸쳐 10acre의 농장을 경작지로 정비하도록 장려했다.
오글소프와 이사들은 조지아 주의 정착을 위한 계약적이고 다층적인 계획(오글소프 계획 참조)을 세웠다. 이 계획은 가족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지원하고 영속시키며, 규제되지 않은 도시화와 관련된 사회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농업적 평등" 시스템을 구상했다. 토지 소유는 50acre로 제한되었으며, 여기에는 마을 구획, 마을 근처의 정원 부지, 그리고 45acre 규모의 농장이 포함되었다. 자립적인 식민 개척자들은 더 큰 토지 보조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보조금은 수혜자가 부양하는 계약 노동자 수에 따라 50acre 단위로 구조화되었다. 계약 노동자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자신의 토지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매입이나 상속을 통해 추가 토지를 취득할 수 없었다.[9]
4. 3. 식민지 통치
1728년 의회에서 감옥 개혁 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오글소프는 3명의 끔찍한 파산자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결과 많은 파산 죄수들이 석방되었다. 그는 이것이 또 다른 도시화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733년 양가의 딸과 결혼한 오글소프는 기술 장교로 사바나에 부임했다. 박애주의자였던 그는 빚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의 피난처를 만들고자 미국 땅에 오게 되었다. 오글소프가 사바나에서 실시한 계획은 토지를 중앙과 공원, 농장 구획으로 나누고, 광장 격자 도로와 공유지를 배치하여 40개의 뜰 택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주민들에게는 18개월 이내에 주택을 짓고, 10년에 걸쳐 10acre의 농장을 경작지로 정비하도록 장려했다.
1740년에는 조지아에서 플로리다로 침입했지만 철수하고 산 마르코스에 침공했다. 그는 노예폐지론자였으며, 1778년 흑인 빈곤층 해방위원회를 설립하고 노예 해방과 서부 아프리카 정착에 노력하여 시에라리온에 회사를 설립하고 프리타운 발전에 기여했다.
1733년 1월 13일, '앤'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도착했다. 같은 해 2월 1일 조지아에 도착했을 때,[2] 오글소프는 "지리적으로 스페인과 가능한 한 멀리" 정착하기로 선택했다. 스페인이 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존재를 싫어했기 때문에, 오글소프는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신중했다. 그는 영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조지아를 더 남쪽으로 확장했다. 1737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분노한 영국과 스페인 정부 모두와 맞닥뜨렸다. 같은 해, 오글소프는 조지아 관리들의 명령에 반하여 40명의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부여했다.
1731년 12월 4일, 오글소프는 장-피에르 퓨리와 협력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에 토지를 정착시켰다. 그는 약 3000acre 규모의 토지에 1/4의 지분을 얻었다. 그의 소유지인 '오글소프 남작령'은 그랜빌 카운티의 사바나 강을 건너는 지점인 '팔라초콜라스'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관리들을 위해 약 2060acre의 구역을 소유했을 수도 있다. 1732년부터 1738년까지 오글소프는 조지아의 사실상 지도자였으며, 군사적, 민간적 측면 모두를 지배했다. 1738년부터 1743년까지 그는 영국 연대를 지휘했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민정에도 관여했다. 그가 식민지와 관련되어 있는 동안, 오글소프는 가장 저명한 관리였고 실제로 식민지에 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식민지를 지도하는 데 관여했다.[22]
1734년 오글소프는 현재도 활동 중인 솔로몬 프리메이슨 로지를 설립했다.[8]
오글소프와 이사들은 조지아 주의 정착을 위한 계약적이고 다층적인 계획( 오글소프 계획 참조)을 세웠다. 이 계획은 가족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지원하고, 규제되지 않은 도시화와 관련된 사회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농업적 평등" 시스템을 구상했다. 토지 소유는 50acre로 제한되었으며, 여기에는 마을 구획, 마을 근처의 정원 부지, 그리고 45acre 규모의 농장이 포함되었다. 자립적인 식민 개척자들은 더 큰 토지 보조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보조금은 수혜자가 부양하는 계약 노동자 수에 따라 50acre 단위로 구조화되었다. 계약 노동자들은 복무 기간이 끝나면 자신의 토지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매입이나 상속을 통해 추가 토지를 취득할 수 없었다.[9]
상대적으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조지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글소프는 곧 식민지의 주요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야마크로 부족과 협상을 벌였고, 식민지의 원주민 부족들에 대한 대사가 되었으며, 민병대를 지휘하고, 사바나 건설을 지휘하는 등 식민지를 전반적으로 감독했다. 1733년 초에는 "모든 중요한 문제가 먼저 오글소프에게 제기되었다". 그는 다른 식민 개척자들과 분리된 천막에서 살았고, 일부 식민 개척자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오글소프는 사바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초의 요새' 건설 비용을 지불했지만, 완공되지 않았다.[18] 그는 재능 있는 외국인들이 식민지로 이주하도록 초청했다. 1733년 6월, 오글소프는 찰스턴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부재 중에 사바나 시민들은 책임자로 남겨진 사람의 권한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그들은 오글소프가 돌아와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다렸다. 7월에 별도의 법원이 설립되었지만, 오글소프는 여전히 많은 민사 권력을 유지했다.
오글소프가 조지아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미 유럽인들과 통합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가져온 새로운 경제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보았다.[10] 그는 "인디언들과의 공정한 거래"로 알려졌으며, 사바나를 건설할 토지를 얻기 위해 토모치치 야마크로 부족장과 협상했다. 토모치치는 오글소프의 "신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되었다.
1734년 초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오글소프는 3월 2일에 찰스턴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언 문제를 논의했고, 캐롤라이나 지도부와 협의한 후, 이 지역의 프랑스 영향력에 맞서고 원주민 부족 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상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역할을 할 "상부 크리크 사이에 요새"를 건설할 대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오글소프는 패트릭 매케이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5월 7일, 오글소프는 호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고, 그와 함께 크리크 사절단을 데려갔다.[11] 여기에는 오글소프가 야마크로와 맺은 조약의 공식적인 비준 과정에서 참석하도록 조지아 이사들에 의해 초청된 토모치치도 포함되었다.
사절단은 6월 16일에 도착했고, 조지 2세 국왕과 그의 가족을 켄싱턴 궁전에서 만났다. 오글소프는 런던에서 널리 칭찬을 받았지만, 그의 팽창주의는 모든 계층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영국의 대외 정책을 담당했던 뉴캐슬 공작은 스페인을 동맹으로 삼고자 했던 뉴캐슬의 바람과 달리 스페인을 불쾌하게 할까 봐 식민지에서 오글소프의 노력을 억제하려고 했다. 뉴캐슬은 결국 양보하고 식민지를 지지하며 "이제 조지아를 포기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했다.[12] 이 식민지의 존재는 1730년대 후반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악화시킨 여러 분쟁 중 하나였다.[13] 토모치치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오글소프와 헤어지는 것을 "죽음의 날과 같다"고 말했다. 1735년 3월, 이사들은 오글소프의 촉구에 따라 알타마하 강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는 데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의회에 51,800파운드를 요청했다. 결국 26,000파운드의 예산이 책정되었고, 이사들은 강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을 승인했다.
오글소프의 영국 귀환은 조지아 이사들의 회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의 촉구에 따라 이사들은 럼주, 노예 제도의 판매를 금지하고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규제했다. 그는 원주민과의 무역 허가를 부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그는 이 권한을 자주 사용하여 조지아 주민에게만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캐롤라이나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오글소프가 1734년에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권력 공백을 남겼다. 그가 부재 중에 민간 당국과 군 당국 간에 의견이 갈렸고, 보고된 반란이 그가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데 역할을 했다. 1735년 12월, 그는 식민지에 257명의 이민자를 더 데리고 조지아로 떠났고, 1736년 2월에 도착했다.
그가 식민지에 머문 9개월 동안, 오글소프는 주로 프레데리카에 있었다. 그가 스페인의 간섭에 대한 보루 역할을 하도록 설계한 마을에서 그는 다시 가장 큰 권위를 행사했다. 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5월에 그는 사바나로 가서 300~400건의 민원을 청취하고 "최고 민정 당국"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글소프는 점점 조지아의 남쪽 국경과 군사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자신이 "통치에 가장 적합하다"는 믿음을 유지했다. 오글소프는 또한 1736년 인디언 문제 담당관으로서 원주민들과 회의를 가졌다. 오글소프의 행동에 대한 불만은 스페인, 캐롤라이나, 이사들 그리고 불만을 가진 시민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오글소프는 군대를 요청하기 위해 11월에 식민지를 떠나 또 다른 권력 공백을 남겼다. 불만이 증가했고, 오글소프는 이것을 자신의 부재의 증상으로 간주했다. 영국에서 그는 이사들에게 자신의 "결함 없는 행실"을 설득했고, 그의 봉사에 대해 감사를 받았다.
4. 4. 노예 제도 반대
1735년 하원에서 노예 제도가 금지되었다.[3] 오글소프는 노예 제도가 조지아가 효과적인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에 반대했다. 그는 노예들이 스페인인들과 협력하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지아는 캐롤라이나와 같이 쌀 기반의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그 경제는 누에고치와 포도주를 기반으로 할 의도였기 때문에 대규모 노예 제도가 불필요했다. 그는 또한 노예 제도가 "조지아 백인 주민들의 도덕과 관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3]오글소프는 1730년대 후반 노예 제도 금지를 지지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수탁자들은 1750년에 금지령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3]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기 작가 마이클 서몬드는 "제임스 오글소프, 조지아의 아버지 — 노예 상인에서 폐지론자로의 건국자의 여정"(2024)에서 오글소프와 노예 제도의 관계는 복잡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했다고 주장한다. 원래 영국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이사였던 그는 미국을 방문한 후 그 잔혹함에 혐오감을 느껴 그 제도에 환멸을 느꼈다. 서몬드는 그의 노예 제도에 대한 증가하는 적대감을 보여주는 서신과 기타 기록의 형태로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1739년 초 오글소프는 조지아에 노예 제도를 도입하면 “아프리카의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예 제도의 악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영국으로 여행한 두 명의 전 노예를 도왔다. 후에 그는 영국 폐지론 운동의 초기 창립자 중 두 명인 그랜빌 샤프와 한나 무어와 연관되었다.[18]
5. 젠킨스의 귀 전쟁
오글소프는 조지아를 '완충지대'로 만들기 위해 스페인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15] 1737년에는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의회로부터 3만 파운드의 지원금을 요청했고, 민병대를 모집하려 했으나 실패했지만, 2만 파운드를 지원받고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의 군대 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15]
1738년 3월, 스페인이 식민지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지만 취소되었다. 오글소프가 연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에드워드 버논을 비롯한 다른 수탁자들은 오글소프가 식민지 민정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오글소프가 로버트 월폴과 함께 투표를 시작한 것을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비난했고, 식민지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수탁자들은 오글소프가 조지아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다.
오글소프는 1738년 초부터 전쟁을 대비해 병력을 모집하고, 왕립 해군이 함선 주둔을 거부하자 여러 척의 보트를 임대하거나 구입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103395GBP를 조지아 방어에 사용했다.[15] 그는 해적이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지역 원주민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곧 병에 걸려 전투 기간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오글소프는 전쟁 준비를 하면서 민정과 군정 권한을 통합하려 했고, 식민지 주민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토지 정책 변화를 전달하지 않는 등 다른 수탁자들의 의견을 무시했다.[15]
1741년 수탁자들은 조지아를 두 구역으로 나누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오글소프는 그들과의 협력을 거부했다.[15] 이후 1743년, 윌리엄 스티븐스가 조지아 대통령으로 임명되면서, 수탁자들은 오글소프와의 협력 부족에 대한 좌절감을 드러냈다. 오글소프는 프레데리카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 스티븐스가 사바나를 통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스티븐스 정부는 항상 오글소프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오글소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조지아는 "그 자신 외에는 모든 논쟁을 지휘하고 결정할 사람이 없을 때" 가장 잘 기능한다고 생각했다.[15]
5. 1. 전쟁 발발 및 초기 전투
로버트 월폴은 오글소프에게 스페인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지만, 오글소프는 조지아가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15] 1737년, 토마스 펠럼-홀레스는 그에게 조지아와 스페인 플로리다 국경 방어를 위해 제42연대를 모집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해 9월 10일, 오글소프는 대령으로 승진했다.[15]1738년 10월 또는 9월에 프레데리카로 돌아온 오글소프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전 재산 103395GBP를 조지아 방어에 사용했고, 해적에게 스페인 선박 공격을 허용했으며, 원주민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젠킨스의 귀 전쟁은 1739년에 발발했다.[3]
1739년 9월, 오글소프는 크릭 인디언들이 스페인 플로리다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11월 스페인의 공격에 대응하여 12월 1일, 그는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플로리다를 급습했다. 그들은 포트 피콜라타까지 진격했지만, 화력 부족으로 후퇴했다. 1740년 1월 1일, 오글소프는 다시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침략하여 포트 피콜라타와 포트 산 프란시스코 데 푸포를 점령하고, 전자는 불태우고 후자는 조지아의 것으로 주장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지원을 늦게 제공하자, 오글소프는 찰스턴으로 가서 하원 의회와 대화했다. 그들은 오글소프가 요청한 800명 중 300명을 제공하고, 원주민들을 위한 보급품을 보내기로 했다. 5월 10일, 오글소프는 포트 세인트 디에고를 공격하여 5월 12일까지 점령했다.
5. 2. 세인트 오거스틴 포위전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이 발발하자[14] 오글소프는 전쟁 준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전 재산인 103395GBP를 조지아 방어에 투입하고, 해적에게 스페인 선박 공격을 허가했으며, 원주민들의 지원을 확보하려 노력했다.[15] 1739년 9월 7일 조지 2세의 명령에 따라 크릭 인디언들을 부추겨 스페인 플로리다를 공격하게 했다.[16]
1740년 1월, 오글소프는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플로리다를 침공하여 포트 피콜라타와 포트 산 프란시스코 데 푸포를 점령했다. 그는 푸포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조지아로 돌아왔다.[16] 이후 산 마르코스 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지원이 늦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3월 23일 찰스턴으로 가서 사우스캐롤라이나 하원 의회와 대화한 끝에, 300명의 병력과 원주민 지원 보급품을 받기로 약속받았다.[15]
5월 10일, 오글소프는 포트 세인트 디에고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5월 말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대 병력 376명이 합류했다. 식민지에서는 포병과 함선도 지원하여 오글소프는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했다"고 평가했다.[15]
오글소프는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기술자와 마차용 말, 포병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식민지들로부터 보급품을 요청했고, 왕립 해군은 세인트 어거스틴에 대한 봉쇄를 실시했다. 오글소프는 포위와 공격을 계획했지만 보급품 부족으로 실행이 불가능했고, 봉쇄를 통해 도시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세인트 존스 강을 통한 보급품은 산 프란시스코 데 푸포 요새를 통해 차단했다.[15]
6월 15일, 오글소프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군과 야마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6월 말, 스페인 소함대가 봉쇄를 뚫고 도시에 증원군을 보냈다. 7월 초 허리케인 시즌이 시작되면서 해군이 철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글소프는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 공격을 계획했지만 해군의 철수 의사로 인해 포기했다. 결국 오글소프는 포위를 포기하고 후퇴 중 후위를 지휘했다.[15]
ODNB는 오글소프의 군사적 공헌이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세인트 어거스틴 공성전의 패배는 오글소프의 책임으로 돌려지기도 하지만, 베인(Baine)은 오글소프가 장군으로서 실수를 했지만 실패의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3]
5. 3. 블러디 마시 전투
젠킨스의 귀 전쟁 중 조지아에 대한 반격을 감행한 스페인군을 오글소프가 이끄는 군대가 블러디 마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로 물리쳤다.[16][3]6. 영국 귀환 및 말년
오글소프는 세인트 어거스틴 공격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와 자금 횡령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결혼했으며,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에 참전하여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명령 불복종 및 자코바이트 동조 혐의로 다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또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중장으로 진급했지만, 컴벌랜드 공작에 의해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1754년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는데, 이는 선거 조작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석연치 않은 결과였다. 이후 오글소프는 은퇴하여 런던에서 새뮤얼 존슨, 제임스 보스웰 (
1755년부터 1761년까지는 영국을 떠나 있었는데, 이 시기는 "잃어버린 세월"로 불릴 정도로 행적이 묘연하다. 프로이센 군에 합류하여 7년 전쟁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1768년에는 코르시카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고,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는 미국 식민지에 동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785년 존 애덤스를 만난 후, 같은 해 7월 1일 에식스주 크랜햄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인은 인플루엔자가 폐렴으로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6. 1. 군사 재판 및 명예 회복
오글소프는 1743년 9월 28일 세인트 어거스틴 공격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식민지 문제에 다소 관여했지만, 조지아로 돌아가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이사들의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이후 자금 횡령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았으나, 이틀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3] 1744년 9월 15일에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결혼했다.[3]오글소프는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당시 영국군에서 복무했다. 당시 소장이었던 그는 요크(영국)에서 집결하고 있던 약 600명의 정부군을 지휘했다. 자코바이트 군대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부대가 영국에 진입했고, 오글소프는 1745년 12월 자코바이트 퇴각군이 프레스턴(랭커셔)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2월 17일, 그는 처음에 조지 머레이가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 후방과 섐프에서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글소프의 정보에 따라 다음날 아침 일찍 자코바이트를 도시에 가두라는 명령이 수정되었지만, 명령이 변경되자 자코바이트 군대는 떠났다. 다음 날, 오글소프는 클리프턴(컴브리아)으로 이동하여 그날 저녁 클리프턴 무어 스커미시 전에 자코바이트로부터 다리를 점령했다. 이 작은 전투에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의 탈출을 막을 수 없었다. 오글소프가 섐프에서 자코바이트의 탈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는 명령 불복종 혐의와 자코바이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듬해 오글소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군사재판을 받았다. 장황한 변론 끝에 그는 토마스 웬트워스가 이끄는 12명의 고위 장교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747년 9월 19일, 중장으로 승진했다.[19] 그러나 클리프턴 무어에서 지휘를 맡았던 컴벌랜드 공작은 오글소프에게 다시는 지휘권을 맡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6. 2. 결혼 및 의회 활동
오글소프는 1743년 9월 28일, 세인트 어거스틴 공격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식민지 문제에 다소 관여했지만, 조지아로 돌아가지 않았고 이사들의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오글소프는 자금 횡령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았으나 이틀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3] 1744년 9월 15일, 오글소프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결혼했다.[3]오글소프는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 당시 영국군에서 복무했다. 당시 소장이었던 그는 요크(영국)에서 집결하고 있던 약 600명의 정부군을 지휘했다. 자코바이트 군대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부대가 영국에 진입했고, 오글소프는 1745년 12월 자코바이트 퇴각군이 프레스턴(랭커셔)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2월 17일, 그는 조지 머레이가 이끄는 자코바이트 군대 후방과 섐프에서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자코바이트를 도시에 가두라는 명령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명령이 변경되자 자코바이트 군대는 이미 떠난 뒤였다. 다음 날, 오글소프는 클리프턴(컴브리아)으로 이동하여 그날 저녁 클리프턴 무어 스커미시 전에 자코바이트로부터 다리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정부군은 자코바이트의 탈출을 막지 못했다. 오글소프가 섐프에서 자코바이트의 탈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는 명령 불복종 혐의와 자코바이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듬해 오글소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군사재판을 받았으나, 토마스 웬트워스가 이끄는 12명의 고위 장교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747년 9월 19일, 오글소프는 중장으로 승진했다.[19] 그러나 클리프턴 무어에서 지휘를 맡았던 컴벌랜드 공작은 오글소프에게 다시는 지휘권을 맡기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여러 개혁 노력에 거의 성공하지 못하고 일하다가, 1754년 선거에서 제임스 모어 몰리뉴와 필립 카터렛 웹에게 의회 의석을 빼앗겼다. 오글소프의 패배는 그가 에식스로 이주하고 유대인 귀화법을 지지했기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베인은 그 선거가 "그에게 불리하게 조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웹과 몰리뉴는 선거구의 관리인, 집달리, 경찰을 장악했고, 허수표 투표를 통해 자격이 없는 유권자들을 더 많이 받아들였다. 1754년 선거에서는 이전 선거보다 약 50명의 유권자가 더 투표했는데, 이는 오글소프가 선출된 이후 유권자 수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오글소프와 버렐이 의회에 항의했지만, 선거 결과는 유지되었다.[3]
6. 3. 은퇴 및 문학 활동
오글소프는 은퇴 후 런던에서 새뮤얼 존슨, 제임스 보스웰, 한나 무어, 올리버 골드스미스 등 여러 문학 인사들과 교류했다. 특히 보스웰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4] 보스웰과 존슨은 오글소프의 전기를 쓰겠다고 제안했고, 보스웰은 자료를 수집했지만 출판되지는 않았다.[5]1755년부터 1761년까지 오글소프는 영국을 떠나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실종된 세월"로 불린다. 1755년 9월 22일, 조지 3세에게 조지아 연대 재활성화를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12월 9일 영국을 떠나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1710년대에 함께 싸웠던 친구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키스에게 프로이센 군대의 직책을 요청했다. 1756년 5월 3일 키스에게 편지를 쓴 후 5년 동안 오글소프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보스웰은 그가 "1756년에 그의 친구 키스에게 해외로 갔고 [...] 군대에서 싸웠으며" "키스가 죽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고 썼다. 베인은 오글소프가 '존 테베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1756년 중반이나 후반에 프로이센 군대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키스와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7년 전쟁의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겨울 동안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군대를 떠났을 것이다. 1758년 초, 오글소프는 영국인 조셉 요크에게 발각될 뻔했다. 그는 10월 14일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키스는 호흐키르히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오글소프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그는 1759년 3월 군대를 떠났고 1761년 10월까지 영국으로 돌아왔다.[6]
1768년 5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정복 기간 동안 오글소프는 코르시카 독립을 지지하는 세 편의 수필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는 보스웰과 함께 코르시카의 독립을 강력하게 옹호했다.[7]
미국 식민지 주민들이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자, 오글소프는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1777년 6월부터 1778년 4월까지 오글소프와 그랜빌 샤프는 영국 지도부를 설득하여 전쟁을 끝내고 식민지 주민들에게 완전한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오글소프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군 사령관직을 제안받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에 대한 진실을 찾지 못했다.[8] 1785년 6월, 오글소프는 런던에서 존 애덤스를 두 번 만났다.[9]
6. 4. "잃어버린 세월"과 사망
오글소프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그는 노출되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의 유지 및 교육을 위한 병원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영국 어업을 장려하는 위원회의 일원이었다.[2] 은퇴 후 그는 런던에서 새뮤얼 존슨, 제임스 보스웰() , 한나 무어, 올리버 골드스미스를 포함한 여러 문학 인물들과 친구가 되었다. 오글소프와 보스웰은 특히 가까워졌다.[3][4] 보스웰과 존슨은 오글소프의 전기를 쓰겠다고 제안했고, 보스웰은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한 책은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4]1755년부터 1761년까지 오글소프는 영국을 떠나 있었다. 이 6년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 기간은 그의 "실종된 세월"로 불린다. 1755년 9월 22일, 그는 조지 3세에게 조지아 연대를 재활성화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실패했고, 12월 9일 오글소프는 영국을 떠나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1710년대에 함께 싸웠던 친구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키스에게서 프로이센 군대의 직책을 요청했다. 1756년 5월 3일 키스에게 편지를 쓴 후 5년 동안 오글소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보스웰은 그가 "1756년에 그의 친구 키스에게 해외로 갔고 [...] 군대에서 싸웠으며" "키스가 죽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고 썼다. 베인은 오글소프가 '존 테베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1756년 중반이나 후반에 프로이센 군대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키스와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7년 전쟁의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겨울 동안 일부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군대를 떠났을 것이다. 1758년 초, 오글소프는 영국인 조셉 요크에게 거의 발각될 뻔했다. 그는 1758년 10월 14일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키스는 호흐키르히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오글소프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그는 1759년 3월 군대를 떠났고 1761년 10월까지 영국으로 돌아왔다.[5]
1768년 5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정복 기간 동안 오글소프는 코르시카 독립을 지지하는 세 편의 수필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는 보스웰과 함께 코르시카의 독립을 강력하게 옹호했다.[6]
미국의 식민지 주민들이 인식된 불의에 대해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자, 오글소프는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1777년 6월부터 1778년 4월까지 오글소프와 그랜빌 샤프는 영국 지도부를 설득하여 전쟁을 끝내고 식민지 주민들에게 완전한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오글소프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군 사령관직을 제안받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스팔딩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진실의 단편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7] 1785년 6월, 오글소프는 런던에서 존 애덤스를 두 번 만났다.[8]
오글소프는 1785년 7월 1일 런던 동쪽의 에식스주 크랜햄의 한 저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88세였다.[9]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플루엔자와 같은 질병이 폐렴으로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10]
7. 유산 및 기념
오글소프 대학교와 오글소프 공원이 애틀랜타에 있으며, 조지아주 전역에는 오글소프 카운티와 오글소프 마을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0] 크랜햄에 있는 제임스 오글소프 초등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86년, 조지아주 달로네가에 있는 조지아 대학교 사관학교는 공식적으로 부대 이름을 "멧돼지 머리 여단"으로 채택했다. 멧돼지 머리는 제임스 오글소프 가문 문장의 일부였으며, 조지아의 유산과 조지아 대학교 사관학교의 정신에 깊이 깃든 투쟁심과 환대의 상징이다.[21]
오글소프가 매장된 크랜햄의 올 세인츠 교회는 1871년경 재건되었다. 오글소프의 시적인 대리석 기념비는 제단의 남쪽 벽에 있다. 1930년대에 쏜웰 제이콥스는 올 세인츠 교회 제단 중앙에 있는 오글소프 가족 납골당을 발굴했지만, 오글소프 대학교(애틀랜타)로 장군의 유물을 옮기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와 헨리 베이컨이 제작한 사바나, 조지아주 치피와 광장에 있는 제임스 오글소프 기념비는 1910년에 공개되었다.[22] 오글소프는 조지아의 한때 적이었던 스페인 플로리다를 향해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칼은 뽑혀 있다.[23] 사바나의 또 다른 광장인 오글소프 광장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조지아주 카토사와 워커 카운티에 있는 포트 오글소프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오글소프 기념일 이후로 조지아의 한 여성 자선 단체가 올 세인츠 교회 제단 난간을 기증했다. 1996년 당시 조지아 주지사인 젤 밀러는 고달밍과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열린 오글소프 3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24]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는 오글소프의 초상화 두 점이 소장되어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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